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중희당 (문단 편집) == 역사 == 1782년([[정조(조선)|정조]] 6년)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이양]]이 태어났다.[* 이름의 한자는 '㬀'으로, 원음은 '순'이나, 1784년에 작성된 문효세자의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rd&gubun=des&dataId=G002+JSG+KSM-XB.1784.0000-20211101.RD00505|작명 단자]]에는 음이 '양(陽)'이라고 적혀있다.] 당시로서는 꽤 늦은 31살에 얻은 굉장히 귀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후궁]] 소생임에도[* [[문효세자|이양]]의 [[어머니|생모]]는 [[의빈 성씨]]이다. [[드라마]] 〈[[이산(드라마)|이산]]〉에서 [[한지민]],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세영(배우)|이세영]]이 맡았던 배역.] 이양을 태어나자마자 [[원자(왕족)|원자]]로 봉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0611027_003|#]], 다들 이양이 [[태자|세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11018_001|#]] 자연스레 장차 사용할 [[동궁]]이 필요했다. 그런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동궁은 [[영조]] 말년과 [[정조(조선)|정조]] 재위 초반을 거쳐 전부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아 없던 상황이었다.[* 그 땐 [[사도세자]]도 [[임오화변|죽은 이후]]였고 [[정조(조선)|정조]]는 [[황태손|세손]] 시기의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었다. 그리고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래서 새롭게 지은 것이 바로 중희당이다. 이양은 이 곳에서 세자로 책봉받으니 이가 곧 [[문효세자]]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807002_001|#]] 그러나 [[문효세자]]는 책봉 2년 만인 1786년([[정조(조선)|정조]] 10년) 불과 5살[* [[만 나이]]로는 3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도 같은 해 이 곳에서 눈을 감았다. 중희당이 [[동궁]]의 기능을 잃자 정조는 여기서 [[신하]]들을 접견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5022_001|#]] [[정사]]를 펼치는 등 다양하게 활용했다. [[순조]] 때는 여기서 [[부마]]의 [[간택|삼간택]]을 행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4009_001|#]] 그러다 1827년([[순조]] 27년)에 당시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중희당이 [[정당]]으로 사용했다. 효명세자는 이 곳에서 [[조회]]를 열고 [[정사]]를 보는 등 중희당을 자신의 정치공간으로 적극 활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2702009_007|#]] 1849년([[헌종(조선)|헌종]] 15년)에는 헌종이 여기서 [[죽음|승하]]했다. [[세자]]가 없던 [[철종(조선)|철종]] 시절엔 쓰지 않았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곳에서 [[관례]]를 올린 뒤 [[왕]]으로 즉위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012012_001|#]] 이후 [[명성황후]]의 [[간택]][[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3006_001|#]]과 [[왕세자]](훗날의 [[순종(대한제국)|순종]])의 관례도 여기서 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901020_001|#]] 이외에도 다양한 궁중행사들을 열었으며, [[창덕궁]]에서 [[외국]]의 [[외교관]]들을 접견할 때에도 이 곳을 활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1001_002|#]] 그러다 1891년([[고종(대한제국)|고종]] 28년) 5월, 고종이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는 [[명]]을 내렸고,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805003_001|#]] [[경복궁]]으로 이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경복궁]]으로 옮겼다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무자비한 궁궐철거로 같이 휘말려 헐렸을 가능성이 있다... --지못미...ㅠ-- 다만 헐리지 않고 남아 있을수도 있는데 정황을 추측해보자면 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의 기록이 실록상으로는 1892년(고종 29년)부터 나타나는 점, 그리고 고종이 중희당에서와 유사하게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상 많이 나타나는 점을 감안하면 함화당과 집경당 둘 중 하나가 중희당으로부터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집경당은 정면 9칸으로 동궐도상의 중희당의 정면 칸 수와 동일하다. 함화당과 집경당을 건립하기 전까지는 경복궁의 흥복전이나 만경전에서 접견이 이루어졌는데, 신정왕후가 1890년 흥복전에서 승하한 이후 흥복전과 만경전에서 접견이 이루어진 기록은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양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정사를 보았던 중희당을 아무 이유 없이 내지는 중요한 목적 없이 철거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신정왕후 사망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중희당을 옮겨와서 자신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함화당과 집경당의 기록이 승정원일기상으로는 1890년에 적게나마 등장하긴 하나 189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1892년 7월 이전까지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것이 중희당의 이건에 따른 개축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재건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